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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сентября 2014 года, после долгого времени работы и увольнения с прежнего места, я готовился к новым вызовам и взял небольшой перерыв.
В этот период я проработал год социальным работником в поселении «Новая жизнь» в районе Поксён уезда Ёнгуанг, провинции Чолланамдо.
Это место, где вместе работают детский центр и группа семейного типа, и время, проведённое со многими детьми с разными судьбами и чувствами, оставило глубокий след в моей жизни.

Этот год, наполненный ответственностью, заботой и теплом человеческих отношений, укрепил моё мировоззрение и внутренний стержень как наставника.

Опыт, полученный здесь, всегда будет моим тёплым центром в предстоящем пути.

Год в поселении «Новая жизнь»

20대 김사범 – 태권도를 다시 시작한 이유

20대에 나는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다.
선수도, 관장도 아닌 보조사범으로서의

시작이었다.

태권도를 다시 선택하게 된 계기는

분명했다.
태권도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그 가능성은 나에게 하나의 분명한 도전이었다.

도장에서 보조사범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나는 태권도를 삶의 중심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관장님으로부터 기술보다 먼저 가르치는 방향과 사명을 배웠다.

그 시기 나의 정체성은 신앙이었다.
태권도 수련과 지도, 그리고 삶의 선택은 모두 그 신념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태권도 선교회와의 만남은 지금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계기였다.
태권도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국경을 넘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태권도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분명한 이유가 되었다.
모아두었던 돈으로 자비량 단기 선교에 참여했고, 모스크바와 두샨베 후잔 도시를 돌며 시범과 교류를 경험했다.
그 약 20일간의 시간은 태권도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남겼다.
20대의 태권도는 성과의 시기가 아니라 선택의 시기였다.
그 선택은 이후의 선교사 파송과 사역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김사부로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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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필라델피아태권도 관장님

"소그드 주를 중심으로 한 빌라델비아 태권도 연맹의 구축과 확장"

20대에 태권도에 대한 방향과 맥락이 잡혔다면, 30대는 태권도를 실제로 구축하고 운영하며 확장해 나간 시기였다. 이 시기 나는 형과 함께 타지키스탄에서 빌라델비아 태권도를 창립하고, 연맹 체계를 갖춘 조직적인 태권도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30대 태권도의 중심지는 치칼롭스크(Chkalovsk, 현 Buston)였다. 빌라델비아 태권도 연맹은 이 지역을 중심 거점으로 삼아, 후잔(Khujand, 구 Leninabad), 가이라쿰(Kayrakkum/ 현 Guliston), 업치칼라차(Ovchi Kalacha), 가지온(Goziyon), 키스타쿠스(Kistakus) 등 소그드 주 전역의 총 6개 지역에 태권도 클럽을 설립했다.

각 지역 클럽에는 담당 보조 사범들을 배치하였고, 모든 지역에서 주 3회 정기 수련을 실시했다.

태권도는 단순한 개인 수련 차원이 아니라, 소그드 주 전체를 아우르는 연맹 중심의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매년 2회의 정기 심사를 통해 소그드 주 전 지역의 수련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심사 때마다 많게는 약 300명, 적게는 150명에서 200명 정도의 수련생들이 참가했으며,

이 과정은 단순한 승급 절차를 넘어 연맹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소그드 주 단위의 공식 대회인 소그드 주 태권도 챔피언십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당시 러시아식 행정체계 기준의 오블라스나야(Областная) 태권도 대회로 운영되었으며,

주(州) 단위의 공식 태권도 행사로서 소그드 주 전역의 수련생들이 참가하는 대회였다.

이와 함께 국내 전국 대회와 국제 대회에도 지속적으로 참가하며 선수들의 경험과 기량을 확장해 나갔다.

연맹은 대회와 심사, 각종 태권도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행사 장소 제공, 상장 제작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받았고, 이를 통해 태권도 행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30대 태권도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빌라델비아 태권도 시범단의 활동이었다.

시범단은 많게는 한 달에 두세 차례, 적어도 두 달에 한 번꼴로 정기적인 시범을 진행했으며, 연간 수십 회에 이르는 시범 활동을 수행했다.

스포츠 행사, 문화 행사, 학교 행사, 그리고 국가 단위 행사와 독립기념일 행사까지 다양한 무대에서 태권도 시범이 이루어졌고, 섭외는 끊이지 않았다. 이동은 대부분 개인 차량을 이용해 직접 이루어졌다.

빌라델비아 태권도 연맹은 치칼롭스크(Chkalovsk, 현 Buston)에 사무실을 두고, 소그드 주 태권도 활동의 행정과 운영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태권도 대회, 심사, 검정, 검정 축하식 등 주요 행사가 이 사무실을 중심으로 기획·운영되었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유단자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결국 30대의 시간은 내가 단순한 태권도 수련자를 넘어 연맹을 이끌어가는 관장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였다.

빌라델비아 태권도 연맹을 기반으로 소그드 주 곳곳에 태권도를 뿌리내리며, 태권도가 한 지역 사회를 넘어서는 조직적 기반을 다져나간 것이다. 이로써 30대는 관장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태권도 연맹과 함께 확고히 자리 잡은 시기였다.

40대의 여정,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40대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곁에서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태권도를 이어가던 시간 속에서 말없이 함께 흘러가 주던 시간들은 

나의 정신과 몸을 회복시키며 다시 일으켜 세우는 큰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2012년 5월,
나는 타지키스탄에서 1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함께 귀국했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가 컸고,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돌아보면 40대의 시작은

이전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결과와 책임을 온전히 마주해야

했던 시기였다.

앞이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잠 못 이루는 밤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사회복지사라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망설이고 있던 내게 어머니는 말없이 쌈짓돈을 내어주셨고, 그 돈으로 사회복지사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육교사 과정도 함께 공부하며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축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2013년,
공부를 이어가며 태권도 현장에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토요 태권도 프로그램, 방과후 태권도 교실, 중학교 태권도 특별활동을 맡아 지도했고,
지역아동센터에서는 도우미로 아이들과 함께했다.

그해 대한태권도협회 주관으로 국기원에서 열린 품새 심판 교육에 등록해 교육과정을 연수받았다.
연수 기간을 모두 마치고 수료를 앞둔 마지막 날,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한국대학태권도연맹 품새 심판위원장이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자리에서 제안을 받았고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 한국대학태권도연맹 소속 품새 심판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품새를 심판의 시선으로만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선수 등록이 아닌 일반부로 품새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입상을 하며 경험을 쌓았고, 품새를 ‘보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 경험은 또 하나의 결심으로 이어졌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사람들 속에서 부딪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2014년,
대한태권도협회에 정식으로 품새 선수로 등록한 뒤 본격적으로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사회복지 전문과정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와 보육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제7회 나사렛 총장배 전국태권도 품새대회에서 3위에 입상해 선수 등록 이후 첫 성과를 남겼다.

이후 지역아동센터 그룹홈에서 아이들을 케어하는 생활지도 교사로 정식 근무를 시작하며
태권도와 사회복지, 두 현장을 함께 걸어갔다.

그러던 중 지인의 추천으로 국기원에서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다시 타지키스탄으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 파견’이라는 타이틀은 이전의 삶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결국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파견 사범 선발을 위한 평가와 시험에 응시했고, 그해 8월경 파견 사업 평가에 합격했다.

이후 2014년 10월 국기원과 계약을 체결했고, 같은 해 12월 딸과 함께 다시 타지키스탄으로 들어가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2020년 6월까지 약 6년간 현지에 머물며 태권도 지도와 제자 양성에 힘썼고,
교육·보급·대회 참가 등 다양한 현장 활동을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2019년은 특히 많은 일들이 겹쳐 있던 해였다.
제자들을 이끌고 우즈베키스탄 국제대회에 참가해 출전한 제자 전원이 입상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평창에서 열린 세계태권도한마당에는 심판이 아닌 선수로 출전했다.
또한 태권도 공인 8단에 합격했고, 국제사범 자격과 호신술 사범 자격도 취득했다.

같은 해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태권도 한마당에 심판위원으로 초청되어 활동했다.
2019년 가을, 자카르타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잠시 거치는 동안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치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몇 년간 불편함을 안고 지내야 했던 시간이었지만, 

그 치료를 통해 다시 편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시기에는 무엇보다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처럼 힘들었던 40대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곁에서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태권도를 이어가던 시간 속에서 말없이 함께 흘러가 주던 시간들은  나의 정신과 몸을 회복시키며 다시 일으켜 세우는 큰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2020년 6월 파견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다음 국가 파견을 위한 평가와 시험을 준비했고, 

합격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40대의 여정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태권도로 나를 세워 가던 시간이었고, 이후의 여정을 준비하며 나를 단단히 만들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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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약 종료 이후, 다시 시작된 불안
2020년 6월, 타지키스탄 파견을 마치고 귀국하며 나의 50대는 시작되었다.
국기원과의 계약은 6월로 종료되었지만, 재파견을 준비할 수 있도록 국기원에서는 6개월간 계약을 연장해 주었다.
이 연장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결정이었다.
그 시간을 활용해 나는 재파견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부천에 머물며 두 달간 훈련에 집중했고, 다시 평가를 치르기 위한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준비해야 했다. 이 시기부터 마음의 부담과 걱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재평가 준비와 마음의 부담
재파견 평가는 국가 요청 유형에 따라 나뉘었다.
A국은 겨루기 사범, B국은 품새 사범을 요청하는 구조였고, 나는 두 영역 모두에 대비해야 했다. 품새뿐 아니라 자유품새 구성과 특기 기술 준비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또한 언어 평가 기준이 영어로 통일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러시아어로 활동해 온 나에게 영어 평가는 또 하나의 벽처럼 느껴졌고, 준비 과정 내내 마음고생이 컸다.
평가 자체보다도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재계약과 재파견 여부가 모두 이 평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3. 합격 통보와 동시에 찾아온 병
2020년 12월, 평가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시기에 나는 갑작스러운 고열과 통증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늑막염으로 진단받았고, 코로나 시기였기에 코로나 검사도 함께 진행해야 했다.
바로 그때, 국기원으로부터 재평가 합격 통보를 받았다.
품새와 겨루기, 두 영역 모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지만 나는 그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함께했던 사람들, 동선이 겹쳤던 이들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다.
이후 진단은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확정되었고, 폐에 찬 물 약 0.8리터를 제거하는 치료를 받게 되었다. 병명 확정까지 걸린 몇 주 동안, 나는 격리된 병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4. 치료의 시간, 그리고 버팀
2021년 1월, 나는 폐결핵 진단을 받고 약 2주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초기 치료 이후 전염 위험은 사라졌다는 설명을 들었고, 이후에는 집에서 약물 치료를 이어갔다.
결핵 치료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다.
약을 복용하며 약 7개월간 치료에 집중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을 겪었다.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2021년 한 해는 치료와 회복에 집중해야 했던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을 지나 2021년 7월경, 결핵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 시기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시간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함께 버텨내야 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5. 대기 속에서도 이어진 준비
초기 치료를 마친 뒤, 나는 2021년 3월 입문교육에 참여했다.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로 약 2주간의 교육 과정을 공식적으로 모두 이수했고,
교육을 마친 뒤에는 다음 파견을 기다리는 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2021년은 치료의 후유증과 약물 부작용으로 쉽지 않은 한 해였지만,
국내에 머물며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 집중하는 동시에 파견을 대비한 훈련과 준비를 꾸준히 이어갔다.
이 시기에도 나는 러시아 파견 사범으로서 매월 보고서를 작성하며 역할을 이어갔고,
파견 재개를 기다리며 국내에서 훈련과 준비를 지속했다.
그러나 2022년 7월로 예정되었던 러시아 출장과 현지 활동은 국제 정세와 전쟁 지원 문제로 인해 최종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로 인해 또 한 번의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지게 되었다.
 
6. 50대의 도전, 다시 선수로 서다
대기 기간과 파견 준비 과정 속에서도, 그리고 파견이 확정된 이후에도 나는 선수로서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22년 나사렛 총장배 전국 태권도 품새대회에서 결승에 올라 2위를 기록했고,
2023년, 우간다 출국을 앞둔 4월, 상지대학교 총장배 전국 태권도 품새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라 다시 2위를 기록했다.
2024년에는 우간다 파견 중 한국 휴가 기간에 태권도원 전국 품새대회에 출전했다.
그 대회 중결승에서 2022년 결승에서 패했던 선수를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선수 대기실에서 여유로워 보이는 그를 마주한 순간, 나는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경기는 두 개의 품새로 치러졌다. 첫 품새 고려에서 점수 차로 앞서며 흐름을 잡았고, 마지막 품새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이겨서 결승에 올랐다. 그 순간은 내게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50대에도 계속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한 통쾌한 장면으로 남았다.
50대에 들어 전국대회 결승에 세 차례 오르며 은메달을 세 번 기록했다. 우승에는 닿지 못했지만, 다시 서고 다시 올라섰다는 사실은 분명한 의미로 남았다.
 
7. 아직 끝나지 않은 50대의 여정
50대의 여정은 과거의 성취를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시간이다.
나는 지금 우간다에서 국기원 파견 사범으로 활동하며, 언어의 한계와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도
태권도 교육과 보급, 훈련 체계를 세우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매일 마주해야 하고,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더 나은 태권도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부딪치며 현장을 지켜가고 있다.
50대에 들어 다시 선수로 서고, 다시 평가를 통과하고, 다시 파견의 현장에 서기까지의 시간은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50대의 여정은 멈추지 않았다.
우간다에서 국기원 파견 사범으로서의 역할을 이어가며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50대 - 더 단단하게, 더 높이, 더 성숙하게"

“An Unfinished Journey in My 50s – Stronger, Higher, and More M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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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부의 여정 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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